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키릴 메레츠코프 (문단 편집) === [[독소전쟁]] === 1941년 6월 22일, [[바르바로사 작전]]으로 [[나치 독일]]이 소련을 침공하자 메레츠코프는 소련군 최고사령부인 [[스타프카]](STAVKA)의 구성원이 되었고 [[나치 독일군]]의 진격을 저지하는 노력을 계속 경주했다. 그러나 1941년 9월 [[NKVD]] 수장인 ~~딸랑이~~[[라브렌티 베리야]]가 그를 반역자로 체포했다. 체포된 메레츠코프는 10월까지 구금되었고,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. 하지만, 유능한 장군이 부족했던 스탈린은 그를 석방시켰고, 12월에 북쪽의 볼호프(Volkhov)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944년 2월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. 볼호프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메레츠코프는 북쪽 방면의 독일군 북부집단군의 진격을 저지하고, 레닌그라드가 완전히 포위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(레닌그라드는 라도가 호수를 통해 소량의 보급품을 어느 정도 공급받을 수 있었다). 메레츠코프와 볼호프 전선군은 레오니트 고보로프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협동으로 독일군의 포위망을 깨고자 노력했고, 마침내 1943년 2월, 두 전선군은 시냐비노(Siniavino)에서 서로 연결되었다. 이후 두 전선군은 독일군을 서쪽으로 몰아내고 레닌그라드 포위망을 깨기 위한 일련의 공세를 개시했다. 이 시도들은 1944년 2월에 마무리되었다. 1944년 2월, 메레츠코프는 볼호프 전선군을 떠나 더 북쪽의 카렐리야 전선군으로 부임했다. 여기서는 그는 핀란드를 공격하려는 고보로프의 레닌그라드 전선군을 지원했다. 10월, 메레츠코프는 핀란드 북부를 통해 노르웨이로 철수하는 독일군을 추격했다. 10월, 메레츠코프는 핀란드 북부의 [[페차모]]를 쓸어 버리라는 명령을 받아 그가 가진 극지전에 관한 지식을 활용하여 페차모-키르케네스 작전(Petsamo-Kirkenes Operation)을 실시했다. 이 작전으로 독일군은 완전히 밀려났으며, 이 공로로 메레츠코프는 소련 [[원수(계급)|원수]]로 최종 진급했다. 소련은 [[노르웨이]]까지 독일군을 추격할 심산이었으나, 전후 처리 문제에서 소련이 노르웨이를 장악하는 것을 영국이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스탈린은 노르웨이-핀란드 국경에서 진격을 중지시켰다. 이후 종전 때까지 이 전선은 큰 전투 없이 지나갔다. 그러나 메레츠코프에게는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. 메레츠코프의 다음 부임지는 [[만주]]였다.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, 메레츠코프는 제1극동전선군을 이끌고 [[만주 작전]]에 참가해 손쉽게 [[관동군]]을 격파했다. 이 무렵의 소련군은 독일과 4년 간 격전을 치르면서 단련된 데다가 걸작 [[T-34-85]]로 대표되는 기갑 전력 또한 [[일본군]]을 충분히 압도했다. 메레츠코프는 만주를 거쳐 [[한반도]] 북부에도 진주했다. [[평양]]에 입성한 [[이반 치스차코프]] 지휘의 25군도 메레츠코프의 휘하였다. 이후 메레츠코프는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극동군관구 사령관으로 재임하며 치스차코프를 북조선 군정사령관에 임명해 한반도 북부의 공산화 작업에 참여하도록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